아침에 요셉이 들어가 보니 그들에게 근심의 빛이 있는지라

요셉이 그 주인의 집에 자기와 함께 갇힌 바로의 신하들에게 묻되 어찌하여

오늘 당신들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나이까(창세기 40:6-7)

 

저희 집에 고양이가 있습니다. 이름을 ‘순이’라 지었습니다.

고양이 중에서도 조금 사납다는 아비시니안 종이어서 순해지라는 바람으로 지었지요.

순이를 가만 보면 표정이 없습니다. 아내와 얘들은 있다고 하는데 저는 없어 보이더라고요.

여러 가지 정보를 검색해 보니 원래 고양이는 사람처럼 표정이 두드러지진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은 그 표정과 몸짓을 섬세하게 보는 것에서 놀랐습니다.

관심과 사랑이 디테일을 만들어내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관심을 가지고 보니 놀랄 때는 놀란 표정, 좋을 때는 좋은 표정이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딸과 함께 몇 년 전 도봉구청 옆 작은 동물원을 간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성경에 보면 사반(coney)으로 나오는 바위너구리를 보았습니다.

[사진 박주광]

그런데 그 얼굴을 보며 화들짝 놀랐습니다.

보통 7년을 산다는 녀석의 얼굴이 웃음기도 장난기도 없이

어찌나 침울해 있는지 괜스레 미안해졌습니다.

 

이 친구들 얼굴이 어릴 적에는 아래 사진처럼 천진난만하고

귀여웠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사진 출처 구글]

궁금함이 생겨서 인터넷을 찾아보며 중간 나이 때는 어땠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사진 출처 구글]

어린이 동화에 나오는 ‘돼지 엄마’도 아닌 것이

저렇게 자식들 등에 태우고 키우고 있는 사진이 있었습니다.

늠름하고 당차 보이는 얼굴이지만 다리 쪽을 보니 버티고 있는 모습이 역력했습니다.

물론 “그때는 행복했다”라고 추억할 수도 있었겠지만,

한편으로는 짠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갑자기 연로한 어머니 생각도 나고 열심히 아이들 키우는 젊은 부부 성도도 생각나고

다 키웠지만 여전히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며

뒷바라지하는 성도들의 모습도 오버랩 됐습니다.

 

다만 우리 성도님들의 얼굴은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기를 축복하며 기도했습니다.

물론 우리의 얼굴은 세월의 흔적이 묻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다 좋은 얼굴이요, 복된 얼굴입니다.

 

요셉은 자신도 감옥에 있는 처지였지만 더 어려운 죄수들의

근심의 빛을 살펴볼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마음, 사랑의 마음, 관심과 공감의 빛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한주 예수님의 마음으로 가족과 세상을 더욱 섬세하게 사랑하시기를 축복합니다.